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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제주의 보호수

봉성리의 팽나무

by 코시롱 2009. 1. 17.

  봉성리의 유래를 살펴보면 설촌은 조선 선조 33년(1600)으로 추측되며 확실한 문헌이 없어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최초의 리명은 어음비도내산리로 부르다가 도내산리로 개명된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고종 33년(1895)에 도내산리를 어도리로 개명하여

 58년간 불러오다가 서기 1953년에 봉성리로 개명되었다.

 

 

 봉성리는 최초에 일구, 이구로 분리되어 있었다. 일구는 동개동, 서성동, 중화동, 구몰동, 화전동 등 5개의 자연마을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그 유래를 살펴보면 동동네 석각씨동으로 부르다가 2개의 동을 합하여 동개동이라 불렀으며, 청경이동·서근이동 2개의 동을 합하여 서성동이라 불렀으며,

중화동은 마파지동이라 부르다가 관전동 앞동네를 합하여 중화동으로 하였고, 구몰동은 연못(속칭)지세나못이 있는데 목과 지형지세가 거북이가

 진흙에 빠진 형이라 하여 구몰니동이라 부르다가 구몰동으로 하였으며, 화전동은 솔도동·공초동이 합하여 화전동이라 하였다.
<출처:제주시청 홈페이지>

 이구는 자이동, 고도동, 마전동, 상시동, 마당이동, 금천동 등이었으나 1948년 4·3사건으로 인하여 각지로 분산 소개되었다가

동년 동개동 부유한 택지를 택하여 집단으로 마을을 재건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1950년 이구의 행정이 일구로 합병하게 됨에 따라 동명을

신명동으로 호칭하고 5개동으로 형성되었다. 등이며 그 후 각씨족들이 도내 각처에서 전입하면서 집촌이 형성되었다.
<이하출처:제주시청 홈페이지>

 봉성리의 리명의 유래는 속칭으로 불리우는 '도노미'에서 그 근원을 찾아볼 수가 있다. 도노미라고 불리우는 지역 명칭이 최초는

어음비도내산리로 불렀던 것으로 생각되며 한자표기 기록은 고려 희종 7년(1211) 당시에 도내산리로 표기되었고

그 후 고려 공민왕 원년(1352)까지 140여 년간 봉수대 위치를 도내리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도노미를 한자로는 도내산리로 사용하여 왔음을 알 수가 있다.

 1895년에 제작된 제주삼읍 전도에는 어도리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고종 32년(1895) 제주도 행정구역 개편시 도내산리를 어도리로 개명하여 불러왔다.

 현재 불리우는 봉성리명은 4·3사건 이후 불안한 사회환경에서 리민의 안녕과 화합은 물론 침체일로에 있는 마을의 면모를 새롭게 혁신 발전 시키기 위하여

 1953년 3월 마을 총회에서 리명을 개명하기로 결의하고 추진위원 16인을 선정하여 자체적으로 연구검토하고 대명가에 문의하여 지형과 지세를 고려해서

 봉성리로 개명하였으며 1993년 4월 1일자 북제주군 조례로 공부상 어도리를 봉성리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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