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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제주의 보호수

곽지리의 보호수

by 코시롱 2009. 1. 15.

곽지리는 400여가구에 1,0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곽지리는 제주시 서쪽 24km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애월읍 유일의 해수욕장인 곽지해수욕장이

 위치한 애월읍 제일의 관광지입니다. 일주도로를 기준으로 상동과 하동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으며 곽지패총에서 삼국시대의 원형토기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유래가 깊은 마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산물로는 양배추와 곽지 해수욕장에서 잡히는 대합이 유명하며 특히 대합으로 끓인 대합죽은 어린아이와 노인들의 영양식으로 아주 좋습니다.

해수욕장이 아름다운 마을 곽지리입니다.     

곽지리의 보호수입니다.품격 : 읍,면나무

수종 : 팽나무    수령 : 200년

수고 : 6미터  나무둘레 : 3.2미터

고유번호 : 13-3-2-14  지정일자 : 2002.2.11

 

 마을의 설촌유래를 볼 때 고증으로 유적의 분포범위를 곽금초등학교 일원 서쪽부터 금성일원 남동쪽으로 0.5km까지의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있는데

 패총지대와 유물산포지가 섞여 있다.
이 지역은 해안과의 거리가 0.5km 정도에 불과하는 해발 30∼40m의 낮은 지대로써 생활에 용이한 입지조건 때문에 일찍부터 취락이 형성되었고,

 그래서 제주도내에서 가장 넓은 유적지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패총(貝塚)은 1973년 송석범씨가 처음 발견하였고 그후 1979년, 1984년, 1985년, 1989년 각각 다른 지점에서 제주대학교 박물관 발굴조사단이 조사한 바 있다.

<출처:이하 제주 시청 홈페이지>

 설촌이후 해안 남당물, 석경개, 진모살, 모물일원에 산재하여 거주하였다고 전한다. 서기 1007년 해일 피해로 대부분 매몰되었으며

여기에 살던 주민들이 배드락밭, 송세미, 셋오름길, 엉밭, 도가비지붕, 곽남(郭南)밭 일원으로 거주지를 옮겨 살았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900년전에 상기 일원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자연적으로 곽지 상동, 성로동, 금성상동에 모여 살았으며 일부는 납읍리로 건너 갔다.

 곽지 형서 초기 성씨로는 문씨로 추정하는데 본리에 하르방당이 있었는데 당신(堂神)으로 문씨하르방을 모신 것으로 보아 문씨로 추정된다.

 서기 1271년 김통정 장군의 항몽 당시 총관부가 군사들을 훈련하기 위한 백문사, 관문고상대, 사장사가 있었으며 지금은 백문밭, 관문밭, 사장밭으로 불리어진다.

 서기 1300년 곽지현이 설치되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우리 마을의 제2설촌은 900년 이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곽지리 리명 유래는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900여년 전 설촌한 현 곽지상동이 주된 마을이었는데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지형은 서북방향이 바다가 보이는 지형이며

지형을 보완하기 위하여 높고 긴 성(長城)을 쌓았고, 마을안 여러 곳에 잣(잔돌로 쌓아 놓은 곳)들이 있어 곽기리(郭岐里)라 하였다가

 곽지리(郭支里)로 통용되었다고 한다.
서기 1300년 고려 충렬왕 26년에 곽지현(郭支縣)을 곽지리(郭支里)로 개칭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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