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길상사를 가 보려고 마음먹던 터라 서울나들이중 제일 먼저 찾은 곳이
이 길상사였습니다. 오늘은 길상사 이야기로 하루를 열어 봅니다.
1987년 공덕주 길상화 김영한님이 법정스님께 음식점이었던 대원각을 청정한 불도량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여
1995년 법정스님께서 그 뜻을 받아들여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말사 대법사로 등록을 한 사찰입니다.
1997년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등록하고
그 해 1차 도량정비불사를 했다고 합니다.
찾아가는 길은 지하철역 한성대역에서 내려 6번출구에서 마을버스 성북02번을 타면 됩니다.
(배차간격 9~11분 첫차 오전 6시~밤 12시 15분)
이 길상사는 원래 우리나라의 3대 요정이라고 하는 (삼청각,청운각,대원각) 중 대원각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김영한이 이 대원각을 시주하고(시가 1,000억) 받은 것이 길상화라는 법명과 염주 하나였다고 합니다.
길상화인 김영한을 말하려면 시인 백석과의 사랑 이야기가 회자되곤 합니다.
백석(1912~1995)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본명은 백기행인데,19세때 일본 청산학원으로 유학하고 돌아와
25세때 1936년부터 2년간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와 영생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는데,이 시절 함흥에서 만난 기생이 바로 자야 김영한입니다.
시인 백석은 김영한이 사다 준 '당시선집'을 읽다가 '자야오가'의 이태백의 시를 발견하고
즉석에서 영한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주게 됩니다.
'자야오가'는 오랑캐를 무찌르러 서역에 간 낭군을 기다리는 '자야'라는 여인의 애절함을 노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백석은 부모에게 강요에 못이겨 결혼을 하지만 초례만 치르고 자야 김영한에게 돌아오기를 여러차례,
마침내 자야에게 결혼하여 만주로 도망칠 것을 설득하지만 거절당하고
어느날 새벽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를 남기고 떠나는데 이것이 영영 이별이 되어 버렸습니다.
겨울날씨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길상사를 찾고 있었습니다.
스님들이 정진을 하는 도량들과 처소가 이어져 있고,
작은 다리를 넘어서면 길상화인 김영한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어느 기자가 물었다고 합니다.
'이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습니까?'
그러나 자야가 대답하기를..
'무엇이 아깝습니까? 백석의 시 한줄값도 안되는 것을'
법정스님이 불사를 하고 난 후 단 하루도 이 절에서 잔 적이 없다고 합니다.
맑고 향기롭게 살고자 하는 염원으로 이루어진 도량으로 만들겠다는 스님의 뜻이었다고 합니다.
2006년 12월 길상사 창건 9주년 법문중에서 법정 스님은,
'좋은 스님들과 신도들이 모여서 법답고 길상스런 도량을 이루게 하시고
안밖으로 보호하고 있는 신도들이 부처님과 보살들의 보살핌 속에 행복한 나날을 이루게 하소서'
자야는 기생들이 옷을 갈아입던 그 자리에 범종각을 세워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야의 유언대로 화장을 하여 길상사의 마당에 뿌려졌다고 합니다.
이 길상사에는 특이한 관음보살상이 세워져 있는데,
2000년 4월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가 만들어 봉안한 석상인데,
종교간 화해의 의미를 담은 보살상이라고 합니다.
길상사 일주문에 들어서 오른편에는 길상7층보탑이 있는데,
조선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이 법정스님과 길상화보살님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자
무상으로 기증한 것이라고 합니다.
법정스님의 유품과 진영을 모신 진영각 앞에는
이렇게 법정스님이 쓰던 작은 나무의자가 추운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길상사 이야기로 열어보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오늘도 고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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