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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제주의 보호수

금악리의 팽나무

by 코시롱 2009. 2. 2.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년 전인 1550년께 상명리에 진주강씨 일가가 이 마을로 이주하여 동네 북쪽을 차지하고 남쪽에는 남양홍씨가 차지하여 설촌한 것으로 전해온다. 그 후 약 100년만에 탐라양씨와 밀양박씨가 입주하고 또 50여년 후에는 경주김씨도 입주하게 되었다.
설촌 당시에는 "수류촌(水流村)"이라 불리워 오다가 이 마을에 있는 오름의 모습이 거문고를 타는 여자형인 데서 1623년께 금물악(琴勿岳)이라 해서 "수류촌"에서 분리했다. 그 후 琴岳으로 표기해 오다가 지금부터 150여년 전쯤에 今岳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출처:이하 금악리 홈페이지>

금악리의 팽나무를 보겠습니다.

 



(이 마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한 기록도 없고 참고할만한 문헌도 없으며 상세히 전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내력을 알기가 어렵다.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와 제남일보에 연재되었던 "제주의 향사"에 설촌연도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여기에 문화혜택이 없었던 시절에 구전된 이야기라하여 많은 어른들이 양해가 있었으면하고 또한 주변이 여러마을이나 각급 행정기관에서 펴낸 향토의 약사와 마을에 최초로 입주하였다는 설촌시조 강응선(姜應善)씨의 가사록등을 참고로 하였음을 밝혀둔다)

 

 

 

이 마을에서는 여러 성씨가 살았으며 선조로부터 전해오는 전통문화의 변천 과정에서 여러 성씨의 공동생활 실태와 그 역사를 더듬어 보면 이 마을에는 광할한 토지(목야지)가 있어서 목축의 적지로 중국의 원나라(몽고)에서 설정한 목장(6소장)이 끼어있으며 몽고의 지배하에 100여년동안이나 목축을 계속하다 고려 공민왕 17년(서기 1386년) 원나라가 폐망함으로 인하여 목자(牧子)들이 원나라로 귀국하였는데 일부 귀국하지 못한 목자의 후손들이 수류천(水流川=옛마을 이름)주변 여기 저기에 산재하여 살았다고 한다.

 


이 목자들이 지역에 산재한 원주민들과 결혼하여 금악리에 입주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들 중에는 성(姓)을 모르는 자가 많았으며 그들은 마을사람들과 서로 도우며 근실한 생활을 하는 자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혼혈족들이 빈곤한 생활과 한스러운 고독감, 비열감등을 덜어주고 잘 보호하여 원주민과 다름없는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기 위하여 그들을 교육시키고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호적이 없는 자들을 다른 집안에 양자로 입양시켜 주거나 솔자 - 거느려 사는 사람 -로 입적시켜 주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서기 1594년(조선조 27년)에 이곳 수류천리 피문악(皮文岳=갯거리) 동쪽 소와리물 동편에 집터를 정하여 입주한 어른이 계공랑훈도 강응선(姜應善)이며 이분이 금악리에 처음 입주한 어른이 되는 셈이다.

 


이 어른이 수류천리내에서 많은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혼혈족 노비들을 호적에 솔자로 입적시켜 살면서 황야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목축에 힘쓰면서 살기 시작한 것이 마을을 형성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