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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제주의 보호수

난산리의 팽나무

by 코시롱 2009. 2. 2.

'아담한 난초동산 문화 옛터에'란 노래말과 같이  우리 난산리는 해발 50여고지에 이르는 천년의 장구한 역사와 선량한 심성을 고이 간직한 조용한 마을, 그리고 광활하게 펼쳐진 산과 들 어느것 하나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는 아서귀포시 성산읍에 속하는 평범한 농촌인 본리의 위치는 읍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일주도로를 따라 5.6km 온평리에서 서쪽(한라산)으로 2.4km에 위치한 중산간마을로 남으로는 삼달리, 북으로는 수산리, 서북쪽으로는 8km에 성읍리가 있고, 남동으로는 해안마을 신산리가 있 아름다운 마을이랍니다. 우리마을 방문하신 여러분 모두를 환영하며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

<출처:이하 난산리 홈페이지>

 난산리에 있는 팽나무를 보시겠습니다.

 

크기가 정말 대단합니다.

 

 

선사시대 후에는 남국계통(남양, 중국, 일본) 종족과 몽고의 원나라가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해상으로 이주하여 유목민족과 결합하여 소위 향상성이동으로 취락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구전에 의하면 본리 현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3km 떨어진 지점인 '새모슬'에서 경주김씨(998∼1009)들이 마을을 형성하여 살다가 현 위치로 이주하여 직촌제시대에는 난민촌으로 1380년경에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1970년대 난산리 면의마루 동네에서 마제석기가 출토된 것으로 보면 입주 연대는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듯하며 제주3읍 시대에 취락은 절정기에 이르렀고, 양반 유림촌이 형성되어 중핵취락으로 번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리명은 '난미'라고 하다가 풍수지리설로 지형이 난초형이라 하여 난야리로 불리다가 한자표기를 위해 '난미,난뫼'를 난산리로 적었고, 1895년에 제작한 지도에 보면 서난산리, 동난산리로 구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행정구역 개편으로 3군으로 제작된 지도, 1896)
지금도 '난미'란 리명은 어른 들 사이에서 종종 쓰여지고 있다. 일례로 난산리에서 다른 마을로 이주간 댁이나 시집간 사람을 '난미집, 난미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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