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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제주 문화유산 답사

아드님과 함께 걸어 본 옛 제주읍성

by 코시롱 2009. 1. 10.

아드님과 약속했던 제주읍성을 걸어봅니다.

 

옛 제주 읍성을 따라서 걸어 보기로 하였습니다.

 

마찬가지 이미 답사한 내용을 토대로 이야기합니다.

 

먼저 그전에 기초한 자료들을 가지고 관덕정에서 출발을 합니다.

 

** 전문가도 아니고 그저 일상생활에서 벗어난 그냥 옛읍성 답사기로 보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전에 공항에 들러 옛 제주사진전에서 1950년대 관덕정 모습이 있어 같이 올려봅니다.

 

 

 

 

"1105년(숙종 10) 탐라군이 설치되면서 축성되었다. 당시의 읍성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탐라국 시대의 성곽을 활용하여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제주읍성은 행정적인 목적 외에도 군사적인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유사시에 적의 침입으로부터 읍성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성곽의 입지적 조건으로 자연적 지형이 매우 중요하게 고려되었다고 합니다."

 

제주은행 서문지점 건물 뒷편의 표지석을 찾아갑니다.

 

 

 

"진서루"라 적혀 있습니다. 

"이곳은 제주성 西門이 있었던 터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1739년(영조15년) 여러차례 중수되다가 1773년 목사 박성협이 다시 중수한뒤

진서루로 바뀌게 되고 그 뒤 보수및 보존하다가 1914년에 헐리었다는 내용입니다."

찾아보니 처음에는 백호루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제주읍성은 본래 동쪽의 산지천, 서쪽의 병문천 사이에 성을 쌓아서 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성 안에 우물이 없어 백성들이 큰 불편을 느끼자 1565년(중종 20) 곽흘 제주목사가 성을 가락천 밖으로까지 넓혀서 축성하였다.

 

 이때부터 산지천과 가락천이 제주읍성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합니다.<출처: 디지털 문화대전>

 

 

옛 관덕로 일대의 모습입니다.

 

 

 

 

 

 

 

1599년(선조 32)에는 성윤문 제주목사가 초루(譙樓: 궁문,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 및 남수각·북수각·제어각 등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겨울철에 공사가 이루어져 작업을 하다 죽은 사람이 10명 중 2~3명에 이르러 제주도민들은 제주읍성을 원축성(怨築城)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1652년(효종 3) 8월에는 폭우로 인하여 남수구와 북수구가 무너지자, 이원진 제주목사가 중수를 하면서 위에 정자를 세워 공진루(拱振樓)라 이름 붙였다.

제주읍성을 동쪽으로 더 늘려 쌓은 이후, 폭우 때마다 산지천이 범람하여 민가가 침수되는 피해가 계속 발생하자

 

1780년(정조 4)에 김영수 제주목사는 옛 성터를 따라 길이 551보, 높이 9척의 간성(間城)을 쌓았다.

 

그리고 간성 남북에 두 개의 문을 개설하여 남문을 소민문(蘇民門), 북문을 수복문(受福門)이라 하였다."

 

<출처:제주시 디지털 문화대전>

 

여기까지의 길을 지도로 편집해 보았습니다.

 

 여기까지 걸으니 "올레코스"처럼 제주읍성 순례기로 이 표지석을 따라 표시를 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여기서 길을 따라 가다  향사당에 잠시 들렀습니다.

 

제주 특별자치도 유형 문화재 6호인 향사당은 1년에 2번 마을 어른들이 모여 활쏘기와 잔치를 베풀며

고을의 당면 과제나 민심을 이야기 하던 곳입니다.향사당은 애초 가락천 서쪽에 있던 것을

1691년(숙종17년) 당시 판관 김동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짓고 1797년(정조 21년) 방어사 유사모가

그 이름을 향사당이라 고쳐 불렀다고 합니다.이 건물은 조선 초기에 좌수의 처소로 쓰이다가

1909년 이후 신성여학교 교지로 이용되고,1981년에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이 길을 따라 제주대학교 병원 서쪽으로 올라갑니다.

 

올라가 남초등학교 뒷블럭으로 돌아 삼도쉐르빌 골목길을 따라 가니 옛 성터 비슷한 곳이 보입니다.

 

전문가가 아니라서 정확하게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삼도 쉐르빌 뒤편으로 구 인천문화당 좁은 길로 돌어가면 구 인천문화당 맞은편에 표지석이 있습니다.

 

바로 남문터의 표지석입니다.

 

 

구 인천문화당 앞 유료 주차장 입구에 세워져 있는 표지석

 정원루라 적혀 있습니다.

"이곳은 제주성 남문이 있었던 터다.

1512년 중종 7년 목사 김 석 철이 성을 개축하면서 이곳에 문루를 세워 정원루라고 하였다.

1705년 (숙종31년) 1780년(정조4) 등 여러차례 중수되어 3대 성문 가운데 가장 오래 남아 있었으나 1918년에 이르러 헐리었다."

 

이 곳을 따라 남문 사거리에서 지금 제주성 복원이 되어 있는 오현단 남쪽을 지납니다.

 

 

 

"지방 기념물 제 3호로 지정된 제주성은 처음 축성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고려 삼별초가 들어온 때 이미 성이 있었고, 

1411년 태종이 성의 수축을 명하였다. 당시 성의 규모는 병문천과 산지천 사이 둘레가 4,394척 (1330미터) 높이 11척(3.5미터) 

으로 동,서,남문이 있었다. 그 이후 1925년부터 제주항을 건설하면서 제주성을 헐어 매립골대로 사용해버려 

지금은 오현단 부근 격대 3개와 성길이 162미터, 높이 3.6미터-4.3미터가 보존되고 있다. 앞으로 시에서는 

동치성과 망루,귤림서원 등을 복원하여 유적지로서의 면모을 갖추고 시민과 관광객이 즐겨찾는 역사의 공원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라는 안내판이 입구에 서 있습니다.

 

 이제는 아드님이 표지석 찾는 재미에 빠져 있습니다.

 

여기서 공항의 옛 사진전에서 찍어온 남수각의 옛 모습을 봅니다.

 

 오현로의 옛 모습입니다.

 

 

동쪽으로 더 가니 삼거리에 귤림추색 표지석이 있고,

 

귤림추색의 표지석

북쪽으로 내려가 오현교에 이르면 또다시 만나는 남수각터의 표지석.

 

"이곳은 제주성 南水閣 이 있었던 터다.1599년(선조32) 목사 성윤문이 축조하고 서남쪽 높은 언덕에

제이각(制夷閣)을 세웠으므로 이 일대를 남수각이라 하였다. 그 뒤로 여러차례의 홍수로

유실,복원되었으나 1927년 대홍수로 무너진뒤 복원되지 않았다."

 

일부 추정되어 남아 있는 성터의 모습입니다.

 

여기까지의 걸음을 알맵으로 편집해 보았습니다.

 

다시 길을 떠납니다. 오현교를 지나가며  오현교에서 바라본 남쪽의 모습입니다.

 

오현교 건너서 왼쪽끝자락에 표지석 하나가 서 있습니다.

 

"을묘왜변 전적지"

"1555년 (명종10년) 왜적 1000여명이 40여척에 분승 화북포로 상륙,제주성을 포위하여 3일동안

공방전이 벌어졌다.이때 아군은 70인의 특공대를 편성,적을 역습하였는데 목사 김 수문의 전략과

김직손,김성조,이준희,문시봉,김몽근 등의 분전으로 적을 대파시켰다."

 

 이 길을 따라 오현로를 건너고,동부경찰서 (옛 동문파출서)로 내려가다 보니,지금 주소가 한글식으로

바뀌고 있는데 그 지명만 보아도 옛 성터임이 짐작이 갑니다.

오현로를 따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면 왼편은 "성지로" 오른편은 "귤림로"로 되어 있습니다.

동부경찰서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가니 동문 표지석이 보입니다.

 

"연상루터. 이곳은 제주성 동문이 있던 자리터이다. 처음 문루는 "제중루"라 하였으나

뒤에 연상루로 고치었다.1566년 (명종21) 곽 흘 목사가 동성을 확장하면서 창건하였다.

1666년(현종7),1808(순조8),1856년(철종7) 여러차례 중수 보전되어 왔으나 1914년 일제 초에 헐리었다.

 

다시 길을 떠나, 제주지방기상청을 거쳐 왼편으로 돌아 내려가면 성곽으로 추정되는 성벽 흔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담 밑에 표지석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북성 홍문 터

"이곳은 제주성 북수구로 홍문이 있던 터다.

처음 죽서루가 있었으나 홍수로 유실되고 1652년 (효종3) 목사 이원진이 보수하면서 공진루를 세웠다.

그 뒤에 홍수가 날때마다 무너져 내려 아예 문루를 없애고 홍문만 남아 있다가 이 홍문도 1927년 홍수로 유실되었다."

 

이제 산지천으로 갑니다.

지금은 복원된 아름다운 산지천의 모습을 볼 수있습니다.

 

 

그리고 이 산지천의 옛 모습을 봅니다.

 

 

 

 

 

이 길을 따라 다시 북초등학교 방향으로 갑니다.이제 제주읍성 따라 걷기가 거의 끝나갑니다.

제주 북초등학교 정문에 이르니 교문 양쪽으로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데요. 왼편에는

 

오른편에는 ..

 

 

영주관터

"조선시대 벽사대청이었던 영주관 터.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89년 이우항 목사가 개건하고,

그 뒤 여러차례 중수하였다.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고 왕명을 받들고 오는 관리들을 접대하고 묵게 하였다.

1907(융희1) 윤원구 군수가 객사골에 사립의신학교와 공립제주보통학교를 창설하면서 폐쇄되었다."

 

제주읍성을 돌아 오니 다시 관덕정 뒷편에 이르렀습니다.

 

나름대로 아드님과 함께 제주읍성을 따라 눈을 맞으며 걸어보니 추운 날씨인데도

주말을 즐겁게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지도로 편집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국립 박물관에 들러 모형으로 제작된 제주읍성을 봅니다.

 

 

전체적인 제주읍성의 모형이구요.

 

그리고 탐라순력도에 나오는 옛 제주읍성의 모습입니다.

 

 

 

 그림으로 편집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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