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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제주 문화유산 답사

제주 목관아

by 코시롱 2009. 1. 9.

제주 목관아를 방문해 봅니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던 제주목(濟州牧) 관아는 지금의 관덕정(觀德亭)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에 분포해 있었으며,

이미 탐라국(耽羅國)시대부터 성주청(星主廳) 등 주요 관아시설(官衙施設)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아시설은 1434년(世宗 16) 관부(官府)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 타 없어진 뒤 바로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그 다음해인 1435년에 골격(骨格)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내내 중·개축(重·改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주목 관아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

 집중적으로 훼철(毁撤)되어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제주시에서는 탐라국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제주목 관아를 원래의 양식(樣式)으로 복구(復舊)하고자,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 발굴조사(發掘調査)를 마친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문화층(文化層)과 함께 문헌상(文獻上)에 나타난 중심 건물인 홍화각(弘化閣)·연희각(延曦閣)·우연당(友蓮堂)·귤림당(橘林堂) 등의 건물터와 유구(遺構)가 확인되고 유물(遺物)도 출토되었다.
1993년 3월 30일에 제주목 관아지 일대가 국가사적(國家史蹟) 제380호로 지정되었고,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초석·기단석(礎石·基壇石) 등을 토대로 하고,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와 『탐라방영총람(耽羅防營總覽)』 등 당대(當代)의 문헌(文獻) 및 중앙문화재위원·향토사학가·전문가 등의 고증(考證)과 자문(諮問)을 거쳐 관아지 복원(官衙址 復元) 기본설계를 완료하였다. 특히, 제주역사의 정체성(正體性)과 중심을 설정하는 이 뜻깊은 복원사업에 소요되는 기와 5만여 장 전량(全量)을 헌와(獻瓦)해 준 30만 제주시민의혼(魂)을 담은 사업이기도 하다.
민관(民官)이 합심하여 복원하게 된 이 장대(壯大)한 제주목 관아는 20세기를 마감하는 1999년 9월에 시작하여

 새로운 세기인 2002년 12월에 복원(復元)을 완료하였다.

 

<출처:제주 목관아 홈페이지>

 

 제일 먼저 입구의 진해루의 외대문입니다.

외대문은 문헌에 "탐라포정사(耽羅布政司)", "진해루(鎭海樓)"로 표기되어 있다.

관아의 관문으로 1435년 홍화각 창건시에 건립했다고 전하며, 1699년 남지훈 목사가 개건했다고 한다. 2층누각 건물로 종루로도 활용되었다. 여기서 새벽과 저녁에 종을 쳐서 성문을 여닫는다고 하며, 그 종은 묘련사의 옛 터에서 가져왔다고 전한다. 이형상의 [탐라순력도](1703년), [탐라방영총람](1760년대)에 목관아 정문으로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다. [남환박물]에 의하면 총 18칸으로 나오며, 관아가 존속했던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대문이다.

<출처:제주목관아지>

이하 설명은 제주 목관아지 홈페이지에서 발췌하고 사진은 직접 찍은 것임을 밝힙니다.

목관아지 상세도면입니다.

 

외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갑니다.

따라오시지요.

 

중대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중대문은 동헌(東軒)으로 통하는 외대문(外大門)과 내대문(內大門)의 중간에 있었던 대문이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의 제주전최도(濟州殿最圖)에 나타나 있다.

 

이제 우연당을 봅니다.

 

 우련당은 1526년(中宗 21)에 이수동(李壽童) 목사가 성(城) 안에 우물이 없으면 적(敵)이 침입하여 성(城)을 포위(包圍)하거나 화재(火災)가 발생하였을 때 구급(救急)하기 어렵다 하여, 못을 파고 물을 가두어 연꽃을 심은 뒤 그 위에 세웠던 정자(亭子)이며, 연회 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우연당 뒷건물인 홍화각을 봅니다.

 

 홍화각이라 명명(命名)한 것은 왕(王)의 어진 덕화(德化)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또한 홍화각은 탐라고각(耽羅高閣)이라 불리었을 정도로 관아건물(官衙建物) 중에서 가장 웅장하였다.

홍화각은 예전에 절제사(節制使)가 사무를 보던 곳이다. 1435년(世宗 17) 최해산(崔海山) 안무사(按撫使)가 창건한 뒤

1648년(仁祖 26)에 김여수(金汝水) 목사(牧使)가 중수하였으며, 1713년(肅宗 39)에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되어 별도로 정아(正衙)를 설치함에 따라

 이 홍화각은 영리청(營吏廳)이 되었다. 그 뒤 1772년(英祖 48) 양세현(梁世絢) 방어사(防禦使)가 중수(重修)하였고 1829년(純祖 29)에는

이행교(李行敎) 방어사가 개건(改建)하였다.

 

 

홍화각 옆으로 영주협당을 봅니다.

 

 영주협당은 원래 군관(軍官)들이 근무하던 관청(官廳)이었다. 창건년대(創建年代)는 확실하지 않으나 예전의 군관청(軍官廳)이

영·목(營·牧) 소속으로 분리될 때 영군관청(營軍官廳)이 되었다.

 

이번에는 귤림당을 만납니다.

 

영주협당 뒷편의 귤림당입니다.

 

귤림당은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거나 시(詩)를 지으며 술을 마시는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이원조(李源祚) 목사의 '귤림당중수기(橘林堂重修記)'에 의하면, "이 땅에 귤명(橘名)으로 된 국과원(國果園)이 모두 36곳인데,

홀로 이 귤림당(橘林堂)만이 연희각(延曦閣) 가까이에 있다.

 

 연희각의 모습을 봅니다.

 

 연희각은 목사(牧使)가 집무(執務)하던 곳으로, 상아(上衙)의 동헌(東軒), 목사의 정아(正衙) 등으로도 불리웠다.

상아라 한 것은 판관(判官)의 집무처(執務處)인 이아(二衙)와 구분해 명명(命名)된 것이다.

 

망경루의 모습입니다. 

망경루는 북두성(北斗星)을 의지하여 임금님이 있는 서울을 바라보며 그 은덕(恩德)을 기리는 신지(信地)이며 중요한 제주목관아의 하나였다.

 

망경루에 올라 남쪽의 모습 목관아지를  바라봅니다.

 

목관아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오른편이 귤림당,오른쪽이 연희각입니다.

 

연희각과 홍화각의 모습입니다.

 

귤림당의 모습입니다.

 

복원된 목관아지를 볼아보며 아름다운 옛 조상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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