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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이야기/제주의 돌담

산담의 의미 -펌-

by 코시롱 2008. 12. 30.

산담 제주의 삼다(三多)중 첫 번째는 ‘돌이 많다(石多)’는 것이다. 산야든 평야든 해안이든 지천으로 널려진 돌.

그래서 제주사람은 돌로 생활터전을 일구고, 죽음의 터를 닦고 있다. 이원진의 『탐라지』 ‘풍속’조에 “밭머리에 무덤을 만든다”라며

제주 무덤의 특이성을 기록하고 있다.

 

 경작지 한가운데 돌담 두른 묘는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보통 묘는 경작지라는 생활공간에 썼기 때문에 경작지와 묘지를 구분하는 경계가 필요했고, 마소 출입에 의한 훼손을

막는 수단으로 돌담을 쌓아 올린 데서 산담이 시작되었다. 그 후 풍수지리설이 제주에 유행되어 명당자리로 이름난 곳이면

 높은 산 낮은 산 가리지 않고 무덤을 써, 산담 두른 무덤이 옹기종기 모여들게 된 것이다. 산담은 화전(火田)을 위해

 놓은 불에서 무덤을 안전히 지켜줬고, 내 묘와 남의 묘의 터를 가르는 분명한 경계선으로서 유용했다.

 

 산담은 무덤을 중심으로 하여 타원형이나 사다리꼴로 만들었다. 타원형 산담은 장사 치르는 당일에 쌓거나,

 경제적 여유가 없을 때, 깊은 산중에서 돌을 구하기가 힘들 때 외담양식으로 쌓았다. 후손들이 제대로 날짜를 잡아

산담을 조성할 땐 사다리꼴 겹담양식으로 쌓았다. 산담은 무덤 앞쪽 길이를 뒤쪽보다 길게 쌓고, 네 귀퉁이에

 각을 살려 안담과 바깥담을 쌓은 후, 그 사이에 잔돌을 채워 넣는다. 사다리꼴 겹담양식의 돌담에는

 신(神)의 출입문, ‘시문’(神門)이 있다.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도록 돌담을 트고, 거기에 길쭉한 돌로

 정(출입을 막는 표식)을 놓은 것이 전통 양식이었다.

시문을 트는 대신 산불이 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출입구를 막고 팡(디딤돌)을 놓아 시문을 표시하고

 출입하는데 편리하도록 한 경우도 있다. 시문의 위치는 망자의 머리를 중심으로 왼쪽에 위치하면

 남자의 묘, 오른쪽에 있으면 여자의 묘인데, 성별에 따라 시문의 위치를 달리 두는 것은 음양론(陰陽論)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

 산담은 우마나 산불의 피해를 막아주는 실질적 기능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산담에 일정한 격식을 갖추고 시문을

 두는 것을 보더라도, 죽은 사람도 산 사람처럼 삶을 살아간다는 내세관이 반영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주 사람들은 조상을 위해 좋은 터를 골라 집을 짓고, 울을 쌓고, 문을 트고, 동자석(童子石)이라 하여

 심부름꾼 아이를 곁에 남겨두고 있다. 돌담 안엔 동자석 뿐만 아니라 상석, 비석, 망주석 등 현무암으로

 조성한 갖가지 석물(石物)이 놓인다. 무덤 앞에 놓는 상석은 제물 진설용으로 현무암이나 조면암을 평평하게 깎아 만든다.

시문과 평행한 위치의 제단 위에 세우는 비석은 무덤의 문패 역할을 하며, 묘제를 지낼 때 축지방의 기능도 겸한다.

 새 비석으로 갈아 세울 땐 묵은 비석은 산담에 얹혀 두는 풍습이 있다. 돌담 귀퉁이에 세우는 촛대모양의 망주석은

 영혼의 집임을 알리는 표석이다. 제주. 산 사람들의 집인 양 ‘영혼의 집’에 설치된 갖가지 석물에서 조상을 섬기는

제주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담 두른 ‘무덤군’은 제주 특유의 미(美)의 상징이 되고 있다.

 

 “제주도는 난석(難石)이 많고 땅이 건조하여 본시부터 논이 없고 밀, 보리, 콩, 조 따위만 나는데 그나마

내 밭 네 밭의 경계가 없기 때문에 힘이 센 집에서 나날이 남의 것을 누에가 뽕을 먹듯 침범하므로 모든 힘없는

 백성들이 괴로워하더니 김구(金坵 1211∼1278)란 이가 판관이 되어 온 뒤에 백성들의 고통을 듣고 돌을 모아 밭에 담을

 두르게 하니 경계가 분명해지고 백성들이 편하게 되었다.”

제주 밭담의 연원에 대해 알 수 있는 『동문선』의 기록이다.

 

 김구는 고종 21년(1234)에 고려 조정에서 처음으로 제주에 파견한 판관이다.

 제주가 돌투성이 섬임을 생각해 볼 때, 김구의 밭담 축조 이전부터 밭을 경작하기 위해 어떤 형태로도든 돌 제거는

 이루어졌을 것이며, 자연스럽게 돌담을 쌓게 됐을 것이다. 다만 김구에 의해 돌담이 공식적 경계표지 의미를 갖게 돼,

밭담이 토지 사유권의 경계로서 광범위하면서도 체계적으로 사용하게 됐다고 문헌기록을 해석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밭담의 조성은 농경에 많은 이점을 가져왔다. 제주 땅은 ‘돌밭’이라고 부를 정도로 돌이 지천이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기 위해 돌 제거는 첫 번째 작업 이었다. 돌을 밭 귀퉁이에 모아 낟가리처럼 쌓아놓은 돌무더기를 ‘머들’이라고 한다.

 이 ‘머들’을 헤쳐 돌담으로 활용함으로써 경작공간을 줄이지 않고 돌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밭도 정리할 수 있게 됐다.

돌담은 또 바람을 효과적으로 막는 방풍막이 되어 흙이나 씨앗의 불림을 막아준다. 제주 흙은 화산회토(火山灰土)라 가벼워서 바람에 날리기 쉽다.

그래서 흙으로 덮어둔 씨앗도 바람에 안전할 수 없는 이치. 따라서 바람막이 역할을 하는 돌담은 제주 농경에 없어서는 안 될 장치다.

 밭담의 유래에서도 보았듯 밭담은 경계표지 역할을 해 이웃 간의 다툼을 없애는 구실을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예부터 소와 말을 놓아기른 제주로서는 가축의 침입으로 인한 농작물 피해도 막을 수 있었다. 이렇듯 농경에

 이로운 다양한 효과 때문에 제주 선인들은 ‘외담’, 벡켓담’, ‘잣벡’ 등 제주 고유의 축담양식을 발전시켜가며 밭과 밭 사이에 끊임없이 돌담을 쌓아나갔다.

그런데 『세종실록』 3년(1421) 3월 22일 갑신조에는 지나친 밭담 축조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제주 백성들이 밭머리에 담장을 쌓아서 소와 말을 밟아 훼손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적이 침입하는 변란이 있을 경우 말을 달릴 수 없으니 방어상 중요한 곳은 청컨대 이를 철거하여 말이 달리는 데 편하게 하십시오.”.

이러한 밭담의 폐단에 대한 건의는 100여년이 지난 중종 때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종은 마소를 방목하여 기르는 제주 사정을 감안하여 밭담을 허물게 되면 마소가 농작물을 해치게 돼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될 것이므로 만약 필요하다면 작은 길을 내도록 하라고 명하고 담장을 허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듬성듬성 쌓아 놓은 제주 밭담은 제주사람의 ‘숨줄’이었다. 거센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는 돌담은 제주 선인들이 험한 자연환경을 극복해 살아나가려는 지혜의 발로다. 농경지를 따라 끊임없이 나뉘고 합쳐지는 검은 밭담은 제주의 독특한 풍경으로 외지인에게 이국적 향취를 불러일으킨다.
                                                                                       

<출처:한국학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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