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제주이야기/제주 문화유산 답사

용연

by 코시롱 2009. 1. 24.

용연을 찾았습니다. 용연 (龍涎, 龍淵, 용소라고도 불림)

한천 하구에 형성된 깊은 소(沼)인 용연은 영주 12경중의 하나인 '용연야범(龍淵夜泛)'의 장소로 '취병담(翠屛潭)'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제주도에 부임한 목사들이 용연에서 여름밤 뱃놀이를 풍류로 즐겼다고 한다.

설연휴 첫날 눈이 엄청 내려 앉습니다.

 

 용연으로 가는 길목에 용담공원이 있습니다.

용담동은 이 용연과 같이 호흡을 해온 동네입니다. 용담동의 설촌과 관련해서는

설촌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원래는 신석기,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모양이다. 이 용담동에서 신석기ㆍ 청동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하천 유역에서 많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오래 전부터 용담동 해안을 따라 작은 촌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다만 지금의 용담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마을 설촌은 한천과 맞닿은 바다가인 용연 인근 ‘한두기(한독, 대독, 한데기이라고도 불림)’라 불리는 곳에 몇몇 가구가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면서 가구와 인구가 늘자 한천 동측은 ‘동한두기’, 서측은 ‘서한두기’라 불리기 시작하였고, 점점 인구가 늘어나자 동ㆍ서한두기를 통칭할 마을 이름의 필요성을 느껴 당시 용연 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의미를 살려 150~170년 전부터 용담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동한두기는 현재 용담1동에 해당하는 지경이다. 그 후 광양에 소재하고 있던 제주향교가 1827년에 이설되면서 향교를 중심으로 자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마을 사람들은 추정하고 있었다.
<출처:디지털문제주문화대전>

이 공원을 따라 가면 용연을 만날 수 있는데요.

 

 

 

 이 겨울에 먼나무가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잔뜩 열매를 매달고 있습니다.

 용연으로 이어지는 길목입니다.

용연의 모습인데요.여기서 용연에 대한 설화를 들어보겠습니다. 

제주도의 문화유산(제주도, 1982)』에는 용소라고 불리는 곳이 예로부터 동해 용이 와서 풍치를 즐겼던 곳이라는 것이다. 몇 백년 전엔가 크게 가물어 제주 백성이 다 굶어 죽게 된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 목사가 크게 걱정하여 몇 번의 기우제를 지내도 비는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때 무근성에 유명한 고씨 심방(巫)이 살고 있었다. 고씨 심방은 어느 날 주막에 앉았다가 지나가는 소리로 ‘용소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올 것을……’하고 말했다. 이 말이 목사의 귀에 들어가 고씨 심방은 동헌(東軒)에 불려갔다.
“네가 용소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온다고 했다는데 사실이냐?”“예, 그리 말했습니다.”“그러면 곧 기우제를 해서 비가 오도록 해라, 비가 안 오면 너는 각오해야 하느니라.”
고씨 심방은 수심이 가득 찼다. 목사의 영이라 할 수 없이 기우제를 올리기로 했다. 이레 동안 목욕재계하여 몸 정성하고 쉰대자 용을 짚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용소 바로 옆 당밭에 제단을 꾸몄다. 쉰대자 용의 꼬리는 용소물에 담그고 머리는 제단 위에 걸쳐놓아 이레 동안의 굿을 시작했다. 고씨 심방은 천상천하의 모든 신들을 청해 들이고 이레 동안 단비를 내려 주도록 빌었다. 굿을 끝마쳐 모든 신들을 돌려보내게 되어도 하늘은 쾌청하게 맑아 비는 내릴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든 신들은 상을 받고 고이 돌아섰건마는 이내 몸은 오늘날 동헌 마당에 가면 목을 베어 죽게 됩니다. 명천같은 하늘님아 이리 무심하옵니까?”
고씨 심방은 눈물을 흘리며 신들을 돌려보냈다. 이때였다. 동쪽 사라봉 위로 주먹만큼한 검은 구름이 보이더니 이 구름이 삽시간에 하늘을 덮고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고씨 심방 이하 굿을 하던 심방들은 환성을 울렸다. 쉰대자 용을 어깨에 메고 비를 맞아 가며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안의 백성들이 모두 나와 용을 같이 메고 풍악 소리에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일행이 동헌 마당에 들어가니 목사 이하 이방, 형방 등 모든 관속들이 나와 용에게 사배(四拜)를 하고 백성들과 더불어 큰 놀이를 베풀었다. 그로부터 용연 은 기우제에 효험이 있다 하여 가물 적마다 여기에서 기우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디지털 제주 문화 대전>

 두번째 설화입니다.

향토지(제주서초등학교, 1986)』에는 조선 선조 때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었다. 조선 선조 어느 해였다. 음력 5월 초순부터 7월 하순까지 석달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고 불덩어리 같은 태양이 내리 쪼여 농작물은 물론 잡초까지 말라죽게 되었다. 그러므로 샘물이 없는 촌가에서는 음료수가 없어서 큰 야단법석이고 앞으로 큰 흉년이 되어 굶어 죽을 형편이니 농민들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이때 농민들이 걱정하는 것 이상으로 수심에 잠겨 무엇인가를 고심하고 있던 제주목사는 눈을 번쩍 뜨고 부하 관속들을 대청으로 불러들이라고 호령하였다. 부하 관속은 모여 와서 꿇어 앉아 대령하니 사또가 위엄있는 목소리로 “너희들 오늘부터 3일간을 목욕재계하고 3일 후에는 제물을 깨끗이 준비한 후 용연 근처에 일반민 통행을 금하고 정한 곳을 가려 설단(設壇)하라” 하였다.

목사가 생각한 것은 이러했다. 옛날 중국 은나라 탕왕(湯王)은 7년 대한(大旱)에 임금 자신이 손발톱과 머리를 깎고 목욕재계하여 정성을 다한 후 기우제문을 지어 읽으니 큰 비가 왔다는 고사가 생각나서 은나라 탕왕처럼 한번 실천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사 자신도 3일 동안을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한 후 용연 동쪽 석벽 곁에 마련된 제단 앞에 나아가서 분향 재배하고 다음과 같이 제문을 낭독하였다.

오랫동안 가물게 되는 것은 본관이 정치를 잘못한 까닭입니까?(政不節與)

백성을 혹독하게 부린 까닭입니까?(使民疾與)

집을 너무 화려하게 한 까닭입니까?(廣室榮與)

여자들을 가까이 한 까닭입니까?(婦謁盛與)

뇌물을 많이 먹은 까닭입니까?(苞苴行與)

참소하는 자를 가까이 한 까닭입니까?(讒夫與與)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과 같이 목사가 기우제를 지낸 날 밤부터 제주 전도에 걸쳐 큰 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후부터 가뭄이 심할 때는 용연 에서 기우제를 지냈고, 기우제를 지내고 나면 용이 비를 내려주었다는 것이다. 이후 사람들은 용연 과 기우제는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용연 위에 있는 누각입니다. 

 눈이 많이 와서 용연 아래의 모습을 담아내지 못합니다.

용연의 구름다리 모습입니다. 

 

 반대편에서 바라본 구름다리의 보습입니다.

 

 

구름다리 밑으로 내려가니 굴이 하나 있는데요 폐쇄를 해 놓아서 들어가 보지는 못하게 입구를 막아 놓았습니다.

1900년대의 용연의 모습입니다. 

 

 DAUM에서 스카이뷰로 캡쳐한 사진입니다.

 

 

'제주이야기 > 제주 문화유산 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두기 마을  (0) 2009.01.27
용두암  (0) 2009.01.24
보성리 붕우릇  (0) 2009.01.19
정난주 마리아 성지  (0) 2009.01.19
귀덕에서 만난 돌  (0) 2009.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