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오름은 항파두리 안에 있다 하여 붙여진 오름으로 항파두리 안과 밖에 들어서 있는 오름으로
제주시 고성리 1146번지 일대의 오름입니다.
표고는 186 비고는 21미터의 오름으로 고성리 남쪽 항파두리성 안(동쪽 외성에 인접)에 위치 해 있어 안오름이라 부르고 있으나, 실제로는 능선으로 성이 관통하여 반은 성안이고, 반은 성밖이 되는 셈입니다.
항파두리 성안과 밖의 모습입니다. 이 곳은 성의 동쪽이구요
서쪽을 보면
성벽을 올라 북쪽을 바라보면 ,
여기서 전설을 하나 들어볼까요?
이 항파두리 동쪽으로 샘물이 있는데 이름하여 장수물이 있는데요. 그 장수물과 관련하여 제주의 김통정 장군 전설을 들여다봅니다.
강화군 교동면에 남편을 잃은 한 여인이 살았다. 그런데 밤마다 어떤 남자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잠자리를 같이 하였다.
남자의 몸에 미리 몸에 묶어둔 실을 따라 가보니 그 남자란 것이 바로 문밖 노둣돌 아래 사는 지렁이었다.
이렇게 낳은 아기는 온몸에 비늘이 돋아있고 겨드랑이에는 자그마한 날개가 달려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지렁이(蚓)와 정(精)을 통(通)해 낳았다 하여 '진통정'이라 불렀으나, 후일 아이의 비범함을 탐낸
이웃의 김씨 가에서 '진'과 '김'이 비슷하다 하여 김씨로 바꿔 김통정이 되었다.
김통정은 자라면서 활을 잘 쏘고 하늘을 날며 도술을 부릴 줄 알았으며 나중에 커서는 삼별초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몽고항쟁 당시 전세가 불리해진 김통정은 진도를 거쳐 제주로 들어오게 되는데 지금의 애월읍 고성리의 항파두리에서 토성을 쌓아
궁궐을 지어 해상왕국을 건설했다. 그는 제주백성들에게 세금 대신 재 다섯 되와 빗자루를 받을 뿐 일절 돈이나 쌀을 받지 않았다.
어느 해 고려군의 김방경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해오자 김통정 장군은 깔고 앉은 쇠방석을 바다 위 수평선에
내던지고 그곳까지 날아가 앉았다. 이에 김방경 장군은 부하 장수들을 새와 파리로 변하게 하여 뒤를 쫓아
고성리 마을 서편 '골그라미 내(川)'까지 가게 되었다.
새로 변한 고려군들이 김통정 장군의 머리 위를 어지럽게 날자 김통정 장군은 비통한 마음에 '이 새는 나를 살리려는 새냐?
죽이려는 새냐?'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젖히고 새를 보았다. 그 순간 목의 비늘에 틈이 생겼다.
파리로 변한 고려군 장수는 이 틈을 노려 장군의 목을 베었다.
김통정 장군이 죽어가면서 '내 백성일랑 물이라도 맘껏 먹고 살아라'하며 바위를 발로 찍으니 그곳이 패이면서 샘물이 솟아 흘렀는데
이 샘물(횃부리)은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고 샘솟고 있다.이 물이 바로 장수물입니다.
김방경 장군이 곧 토성 안에서 김통정 장군의 아이를 임신한 부인을 잡아 불에 태워 죽이니, 매 새끼 아홉 마리가 죽어 떨어졌다.
이 장군의 처가 죽으면서 흘린 피는 일대의 오름을 적셨는데 지금도 흙이 붉어 '붉은 오름'이라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작은 연못도 보입니다.
오름 북사면에서 동남쪽으로 토성이 둘러져 있고, 성벽 밖의 동쪽은 고성천, 서쪽은 봉천계곡으로 이어지며 삼별초군 주둔 당시에는 뱃놀이를 할만큼 큰 못이 있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안오름은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내에 포함되어 있으며, 항몽유적지는 삼별초의 마지막 여몽항쟁의 보루로서 비교적 잘 보존되어 항몽 호국정신을 배우는 국민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오름을 비롯한 항파두리 항몽유적지일대 1,135,476m (문화재 768,534m , 보호구역 366,942m )는 1997. 4. 18일자로 문화재(사 적 ) 제39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습니다.
※ 삼별초와 관련된 오름 : 바다에서 한라산 쪽으로 후퇴지 - 파군봉, 안오름, 극락오름, 붉은오름(한라산국립공원내)의 오름으로 삼별초 최후의 항쟁터로 알려짐
오름 북서사면은 해송 등의 잡목이 우거지고, 남사면은 초지이며 그 아래 자락으로 과수원과 농경지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참고: 항파두리
[항파두리 항몽유적지의 역사적 의의]
이곳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는 고려시대 후기 몽골군이 침입했을 때 삼별초군이 이에 맞서 끝까지 싸웠던 호국 격전지이다.
[몽골군의 침입과 삼별초]
몽골(원나라)은 세계 정벌의 일환으로 1231년(고려 고종 18년)부터 고려에 여러차례 쳐들어왔다. 고려는 몽골과의 싸움에서 밀리자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여러 해 동안 대항하였으나 끝내는 몽골에게 굴복하고 개성으로 환도하였다. 이에 배중손 등은 자주호국의 기치를 내걸고 고려를 몽골의 침입으로부터 끝까지 지키고자 1270년(고려 원종 11년) 6월 군사를 규합하고 대몽 항전을 결의하였다. 이때 중심이 되었던 군대가 바로 '삼별초'였다.
[삼별초군의 항전과 항파두리의 역사]
강화도에서 진용을 정비한 삼별초군은 근거지를 진도로 옮겨 대몽항전을 펼쳤다. 그러나 1271년(고려 원종 12년) 5월 진도가 고려·몽골 연합군에게 함락하자 김통정 장군은 잔여세력을 이끌고 제주도에 들어와 이곳 항파두리에 진지를 마련하고 내·외성을 쌓았다. 특히 외성은 흙과 돌맹이를 섞어서 쌓은 토성으로 그 길이가 15리(6Km)에 달하였으며, 토성 위에는 나무를 태운 재를 뿌려서 연막전술을 폈다고 한다. 즉 적이 나타났을 때 말꼬리에 빗자루를 매달아 달리게 하면 자연히 재가 하늘로 날아 올라 연막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바닷가를 따라 3백여리에 달하는 환해장성을 쌓아서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몽골과 고려 조정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삼별초군이 굴복하지 않자 고려의 김방경과 몽골의 혼도가 이끄는 고려·몽골연합군 1만 2천여명이 1273년(고려 원종 14년)4월 함덕포와 비양도로 상륙하여 공격하였다. 삼별초군은 이에 맞서 혈전을 벌였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김통정 장군은 붉은 오름으로 퇴각한 뒤 자결함으로써 몽골 침입이후 40여년에 걸친 삼별초군의 항몽투쟁은 끝이 났으며 제주도에서 최후까지 항쟁한 2년 6개월의 자취가 곧 이 항파두성 사적지이다.
[역사적 의미와 제주사회에 끼친 영향]
몽골에 점령당한 제주도는 이후 목장을 경영하는 방식이나 언어와 생활습속 등에 몽골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또 삼별초군과 이들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에 들어옴으로서 토목과 건축기술, 양잠과 직조기술, 새로운 농경법이 보급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중앙의 문물과 제도, 불교 문화가 이곳 제주도에 전래되었다.
[항파두리에 얽힌 전설]
이곳 항파두리에는 김통정 장군이 적군이 침입하였을 때 성에서 뛰어 내리면서 밟은 돌에 발자국이 생기고 또 그 곳에서 물이 솟아 나온다는 '장수물'과 삼별초군이 활쏘기를 연습할 때 화살을 맞아 자국이 생겼다는 '살 맞은 돌' 등 여러가지 전설들이 생생하게 전해오고 있다.
[항파두리 항몽유적지의 복원]
항몽 최후의 격전지였던 이곳 항파두리가 호국항쟁의 정신도장으로 빛을 보게 된 것은 7백여년이 지난 1976년 9월 9일 제주도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면서부터이다. 1978년 6월에는 유적지 복원사업에 따라 항몽순의비를 비롯하여 전시관·관리사 등이 설치 되었고 1997년 4월 18일에는 국가 지정 사적 제396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삼별초군의 자주호국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면서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겠다.
** 출처 : 디지털 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