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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재테크/금융이야기

독주한 김우중의 때늦은 눈물 -펌-

by 코시롱 2008. 7. 7.
독주한 김우중의 때늦은 눈물
독주한 김우중의 때늦은 눈물
기업 사례로 본 참모 조직
대우 위기 때 모두 “괜찮습니다”… 구본무·최태원 회장은 전문가형 중시

지금 우리는 예측하기 어려운 변화무쌍한 시기를 살고 있다. 기업 총수나 CEO도 마찬가지다. ‘나 홀로’ 판단하고, 손쉽게 결정하던 ‘만만한’ 시대는 갔다. 반듯한 참모가 없으면 CEO도, 기업도 살아남기 쉽지 않다. 그렇다면 기업 참모의 자격은 무엇일까. 국내 기업들의 참모진 운영 사례를 통해 21세기에 필요한 기업 참모상을 짚어봤다.
전두환 정권은 1986년 ‘해운산업 합리화 조치’를 내렸다. 제품 물동량 감소로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는 해운회사를 정리하겠다는 취지였다. 불똥은 대우그룹에도 튀었다. 대우그룹은 해우선박, 대양선박, 대우조선을 계열사로 두고 있었다. 김우중 회장의 고민은 깊어갔다.

해운회사를 버릴 수도, 서슬 퍼런 군부정권의 칼날을 거역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당시는 정경유착이 심했던 시절이다. ‘천하’의 김우중 회장도 어쩔 수 없었다. 곧바로 미국 최고 선박회사 US Line과 매각협상을 시작했다.

86년 ○월 ○일 오후 8시. US Line 협상단 20명과 김 회장이 힐튼호텔 오랑제리 뷔페에서 비밀리에 마주 앉았다. 대우그룹 핵심참모 10여 명도 참여했지만 협상은 김 회장이 주도했다.

다음날 오전 7시까지 계속된 마라톤 협상 내내 김 회장은 세세한 부분까지 직접 처리하고 의견을 나눴다. 대우그룹 참모들은 그야말로 마네킹 신세였다. 협상이 끝날 즈음, US Line 관계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Chairman is a tough guy, but staff is a weak.”

김우중 회장은 타고난 장사꾼이다. 세계경영을 꿈꿀 정도로 야망 또한 컸다. 자수성가한 덕분인지 실물경제도 능했다. 대우그룹 참모들은 완벽한(?) 주군 앞에 머리를 조아리기 바빴다.

부실한 참모진은 결국 김 회장의 눈과 귀를 막았다. 그의 독주에 대해 쓴소리를 해줄 만한 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우그룹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갔을 때조차 참모진은 총수의 판단과 능력에 기댔다.

김우일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은 98년, 대우의 붕괴를 예감했다. 회계장부가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그로선 방어수단을 마련해야 했다. 그것이 자신의 소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곧장 국내 굴지의 A회계법인을 찾아가 천문학적 용역비 지급을 약속하며, 대응방안 마련을 부탁했다.

A회계법인 대표도 흔쾌히 승낙했다. 남은 것은 김우중 회장에게 보고하는 것뿐. 김우일 본부장은 회장 집무실로 찾아가 직접 정리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김 회장은 당시 대우그룹 참모 3명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한 참모는 “방어는 무슨 방어”라며 “회장도 건재하고, 정부도 있는데”라고 말했다. 김 본부장은 ‘이제 끝이구나’라며 크게 낙담했다. 공교롭게도 그로부터 3일 후. 방어를 약속했던 A회계법인이 정부 지시를 받고, 대우그룹 실사에 착수했다.

방어군이 졸지에 공격군으로 돌변했던 것. 김우중 회장은 속수무책이었고, 참모진은 우왕좌왕하기 바빴다. 김 본부장은 “대우그룹에 훌륭한 참모조직이 있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며 회한에 잠겼다.

참모는 리더의 눈과 귀다. 조직의 심장 소리를 리더에게 들려주는 청진기와 같다. 리더는 참모를 통해 조직을 보고, 느낀다. 훌륭한 참모를 보유한 리더들이 ‘소통’에 능한 이유다.

반대로 참모가 부실하면 리더는 고립되기 십상이다. 리더가 독주할 가능성도 높다. 경영능력 하나만큼은 천하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김우중 회장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LG그룹 참모 출신 오세희 그린우드21 컨설턴트는 “참모와 리더는 불가원 불가근의 관계”라며 “훌륭한 참모는 리더를 보좌할 뿐 아니라 그들의 독주를 견제하는 역할도 한다”고 말했다.

기업 참모조직은 리더의 성향에 따라 다르게 운영된다. 권위형 리더의 참모조직은 대개 약하다. 리더의 생각을 하부조직에 전파하는 메신저 역할이 주요 임무다. 의사전달 구조도 상의하달이다. 반대로 화합형 리더의 참모조직은 활기를 띤다.

메신저 역할뿐 아니라 하부조직의 의견을 리더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일종의 양방향 소통조직이다. 김영훈 연세대 행정학과 명예교수는 “리더가 열린 귀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참모들의 행동반경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지사”라며 “무엇보다 리더가 참모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국내 대기업들은 참모들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을까. 경영쇄신안이 발표되기 전 삼성그룹 참모조직은 규모가 크고 탄탄했다. 가장 시스템화돼 있다는 평가도 받았다.

이는 이병철 창업주, 이건희 전 회장의 리더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병철 창업주는 카리스마형 리더십을 가졌다. 웬만한 배짱이 아니면 이 창업주 앞에서 말 한마디 건네기 힘들었다고 한다.

삼성중국 수장을 지냈던 이필곤 알티캐스트 회장은 “이병철 창업주는 앞을 내다보는 혜안, 냉철한 판단력을 갖고 있었다”며 “이 때문에 이 창업주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이 창업주가 권위형 리더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참모의 말을 경청했다. ‘1문1답 방식’으로 참모들의 의견을 귀담아들었다. 이를 통해 조직의 문제점을 여과 없이 파악했고, 참모진의 역량을 강화시켰다는 게 이필곤 회장의 말이다.

이건희 전 회장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핵심 참모진에 권한과 재량을 줬다. 그룹이 나아가야 할 방향 등 큰 그림을 제시할 때를 제외하곤 참모들의 의견을 존중했다. 삼성 참모회의에서 늘 난상토론이 펼쳐졌던 이유다.

삼성그룹의 참모조직 규모가 상대적으로 크고, 권한과 책임이 막강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병철 시대 참모조직인 ‘비서실’ 규모는 15개 팀 250명에 달했다. 이건희 전 회장 때의 구조조정본부와 전략기획실도 100여 명 인원을 꾸준히 유지했다.

이들 참모조직은 규모만큼이나 큰 성과를 올렸다. 이병철 비서팀은 삼성그룹의 안정적 성장 발판을, 이건희 참모조직은 고속성장을 이끌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일부 문제도 노출했다. 참모조직의 권한과 책임이 커짐에 따라 ‘옥상옥(屋上屋)’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삼성그룹은 현재 ‘경영실험’에 들어갔다. 참모조직인 전략기획실을 해체하고 계열사별 독자경영체제로 전환했다. 참모조직의 단점을 극복, 새로운 삼성을 만들겠다는 취지다. 일각에선 삼성의 실험이 다른 대기업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한다.

반면 우려도 있다. 계열사별 독자경영체제가 과연 시스템화돼 있었던 참모조직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삼성의 자랑이었던 신속한 의사결정, 과감한 투자가 유지될지도 미지수다.

현대차그룹 참모들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작다. 1실, 3담당, 7팀으로 구성된 만만찮은 참모조직인 기획조정실을 두고 있지만 이들의 역할은 크지 않다는 평가다. 이 역시도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과 관련이 깊다.

정 회장은 현장을 지휘하면서 주요 의사결정을 직접 내리는 실무형 경영자다. 그룹 차원의 굵직한 현안은 자신이 결정한다. 참모들의 판단과 조언은 정 회장의 결정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이 때문인지 정 회장에겐 손에 꼽을 만한 핵심 참모가 없다. 정 회장 스스로도 한 사람을 중용, 막강한 권한과 책임을 위임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오히려 수시교체를 통해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한다.

정 회장의 오른팔로 불리는 김동진 부회장조차 현대차의 생산·판매·재무·기획을 담당하고 있을 뿐, 그룹 전체를 총괄하지 않는다. 기획조정실 수장도 수시로 바뀐다.

이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이다. 한편에선 정 회장의 불도저식 경영스타일에는 참모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정 회장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라인(Line)조직이 탄탄해야 한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약한 참모조직 때문에 정 회장에게 과부하가 걸리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우일 전 본부장은 “진짜 참모는 주머니에 사표를 넣고 다니면서 리더의 옳지 못한 선택을 견제한다”며 “이런 관점에서 정 회장에게도 쓴 소리를 해줄 만한 참모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 회장은 지난 몇 년간 숱한 구설에 시달렸다.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구속되는 아픔도 겪었다. 만약 그에게 쓴 소리 하는 참모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대우, 삼성, 현대차 사례는 참모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참모조직이 부실하면 기업의 명운을 장담하기 힘들다. 쓴 소리를 잘해야 참모 자격이 있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하지만 21세기 기업에는 또 다른 유형의 참모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21세기는 격동의 시대다. 변화를 예측하기 쉽지 않다. 이 때문에 기본과 정도에 충실하면서도 통념을 탈피할 수 있는 혁신형 참모가 필요하다.

리더의 식견을 보완해줄 수 있는 전문가형 참모도 절실하다. 실제 전문가형 참모를 등용하는 기업이 많아지고 있는 추세다. LG그룹과 SK그룹이 대표적이다.

LG그룹의 참모조직은 삼성그룹, 현대차그룹과 다르다. 구조조정본부 등 공식 참모조직이 없다. 오히려 LG경제연구원이 구본무 회장의 참모조직으로 부상하고 있다. 현재 LG그룹에 대한 비전 제시는 LG경제연구원의 몫이다. 구 회장이 신규투자와 사업철수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브레인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구 회장의 ‘왕 참모’ 강유식 부회장도 따지고 보면 ‘비서 기능을 하면서 쓴 소리를 해야 하는’ 일반 참모가 아니다. 전문가형 참모다. 그는 LG 최고의 브레인이다.

공인회계사인 만큼 수리에 누구보다 밝다. 영어, 일본어 등 외국어에도 능통하다. 글로벌 참모로서 제격이라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그는 LG그룹의 ‘전략통’으로 교육받고, 성장했다. 문제의 핵심을 뽑아내 단순화하는 데 그만 한 인물이 없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실제 강 부회장은 LG그룹의 구조조정, 지주회사 개편 등 굵직한 변화를 진두 지휘했다. LG 미래사업 포트폴리오도 그의 머리에서 대부분 나온다고 한다. 강 부회장을 비롯한 LG 참모들은 폭넓은 재량은 가지고 있지만 권한은 막강하지 않다.

계열사를 직접 통제하거나 지시를 내리는 일도 없다. ‘월권금지’는 LG 참모들이 지켜야 할 제1원칙이다. 전문적 보좌기능에 전념하라는 것이다.

최태원 SK 회장은 그룹 총괄업무를 담당하면서 총수를 보좌하는 일반 참모조직의 역할에 대해 부정적이다. 이제는 ‘전문가형 참모시대’라고 목소리를 높일 정도다. 최 회장은 현안이 있을 때마다 박영호 SK㈜ 사장을 찾는다. 근무하는 층도 33층(박영호), 34층(최태원)으로 지근거리다.

박 사장은 전문가형 참모의 전형으로 꼽힌다. 무엇보다 시카고대에서 경영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포스코 경영연구소 상무를 지냈다. SK지배구조 개선작업을 이끈 주인공도 그다. 박 사장은 지금도 SK형 지주회사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주식으로 연결된 기업이 아니라 브랜드와 기업문화를 공유하는 네트워크형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게 그의 포부다. 박 사장은 최 회장의 수족, 최측근, 그룹 2인자라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 그저 브레인이자 전문가형 참모일 뿐이라고 말한다.

최 회장의 핵심 참모로 꼽히는 유정준 SK R&C 사장도 박 사장과 마찬가지로 전문가형이다.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대학원에서 회계학 석사를 마친 유 사장은 최 회장의 해외프로젝트를 보좌하고 자문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강충식 SK 매니저는 “최 회장은 전문가적 식견을 가진 참모를 선호하고, 이들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 한다”며 “최 회장이 SK경제연구소 연구원들과 수시로 만나면서 의견교환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

SK경제연구소는 최근 에너지, 통신분야 등 주력사업군에 대한 지식과 세계경영 흐름 등 글로벌 식견을 최 회장에게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오세희 컨설턴트는 “현대 기업조직은 상호 네트워크가 돼 있기 때문에 기획조정 업무를 담당하는 일반 참모조직 역할은 이전만큼 중요하지 않다”며 “이에 따라 현대 기업의 참모는 전문가형이 배치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그래야만 살벌한 생존경쟁이 펼쳐지고 있는 21세기 경제 정글에서 (국내 기업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