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남쪽으로 난 인화문이었다.그런데 동문이었던 대안문(大安門) 앞으로 여러 방향의 도로들이 건설되고 환구단이 건립되면서 궁궐의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대안문이 실질적인 정문 역할을 하게 됩니다.대안문의 大安은 "크게 편안하다"으 뜻을 담고 있었는데.1906년 수리와 함께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대한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출장을 갔다가 다음날 휴일이라 아침에 덕수궁을 찾았습니다.
봄을 완상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많습니다. 그리고 견학을 온 학생들의 모습도 눈에 띕니다.
중화전으로 들어가는 중화문의 모습인데요.
중화전은 경운궁(덕수궁의 옛이름.1611년 광해군3. 부터 고종 재위 마지막 해인 1907년까지 300여년동안 경운궁으로 사용되었습니다.)의 정전(正殿)으로 왕의 즉위식,신하들의 하례,외국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의 의식을 치르던 곳이라 합니다.고종이 경운궁으로 환어한 후 5년 남짓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다가 1902년에 중화전을 새로 지었습니다.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출처:이하 문화재청 홈피>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즉조당과 오른편이 석어당의 모습입니다.
즉조당은 선조가 임시로 거처한 곳으로 덕수궁의 모태가 된 곳입니다.1897년 고종이 환어한 후 중화전이 건립되기까지
정전으로 사용되었던 곳입니다.석어당은 덕수궁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층건물로 소박한 살림집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석조전의 모습입니다.
이 석조전은 처음에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이었던 영국인 브라운이 발의하여 짓기 시작하였으며,설계도 영국인 하딩이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05년 일본인 메가다가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이 되면서 일본의 오쿠라 토목회사가 시공을 맡게 되는데 이 오쿠라는 아시아 여러나라의
문화재를 빼돌린 기업으로도 유명합니다. 실제로 1917년 경복궁 자선당을 해체하여 일본으로 빼돌렸다가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불타 버리고
1995년 초석만 우리나라도 돌아왔을 정도로 악명 높은 기업입니다.
덕수궁 미술관..
광명문에는 시기전 화차와 보루각 자격루,흥천사 종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신기전 화차와 흥천사 종>
<보루각 자격루>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1623년에 물러나면서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그 뒤로 고종황제가 러시아공관에서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때부터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의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이 바뀐 것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비록 조선 후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덕수궁< 德壽宮 > 터< 址 >가 왕궁< 王宮 >으로 쓰이게 된 것은 임진왜란< 壬辰倭亂 >(1592) 때 선조< 宣祖 >가 의주< 義州 >로 피난< 避難 >갔다가 한양< 漢陽 >에 돌아와 보니 왕궁이 모두 불에 타 이곳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선조 26년 (1593)부터 궁< 宮 >으로 사용< 使用 >하기 시작하여 부근의 계림군< 桂林君 >과 심의겸< 沈義謙 >의 집을 궁으로 편입< 編入 >하면서부터이다. 덕수궁 터에는 원래 조선 제9대 성종< 成宗 >의 형인 월산대군< 月山大君 >(1454-1488)의 집이 있었다.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 光海君 >은 이곳에서 즉위< 卽位 > 후 광해군 3년(1611) 이곳을 경운궁이라 고쳐 부르고 1615년 창덕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이곳에는 선조의 계비< 繼妃 >인 인목대비< 仁穆大妃 >가 유폐< 幽閉 >되었던 곳으로 광해군은 이 경운궁을 다시 서궁< 西宮 >이라 낮추어 불렀다. 1623년 인조반정< 仁祖反正 >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이곳 즉조당< 卽조堂 >에서 즉위한 뒤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즉조당과 석어당< 昔御堂 >만 남기고 그 밖의 건물들은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그후 고종황제가 아관파천< 俄館播遷 > 후 러시아 공관< 公館 >에서 환궁< 還宮 >하면서 다시 왕궁< 王宮 >으로 사용하기까지 270년 동안 별궁< 別宮 >으로 사용되었다. 1897년 고종황제는 러시아 공관에서 환궁 후 이곳을 경운궁이라 부르고 그 규모도 확장하였다. 그후 1904년 궁궐 내에 불이나 많은 건물이 타버렸으며 1906년 불에 탄 건물을 복구하고 대안문< 大安門 >을 대한문< 大漢門 >으로 개명< 改名 >하였다. 덕수궁 터에는 1909년 영국인 하딩이 설계한 석조전< 石造殿 >이 세워졌으며 1938년에는 서관이 지어져 이왕직< 李王職 > 박물관< 博物館 >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덕수궁 터에는 미국과 영국대사관을 비롯 지난날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18,635평에 대한문< 大漢門 > 중화문< 中和門 > 광명문< 光明門 > 중화전< 中和殿> 석어당< 昔御堂 > 준명당< 俊明堂 > 즉조당< 卽조堂 > 함녕전< 咸寧殿 > 덕홍전< 德弘殿 > 석조전 < 石造殿 > 등이 있다.
정관헌의 모습입니다.
정관헌은 궁궐 후원의 언덕에서 조용히 궁궐을 내려다 보이는 휴식용 건물입니다.
함녕전 뒤에 자리하고 있는 이 건물은 1900년경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이 한식과 양식이 혼재되어 있는 설계를
한 곳입니다.
함녕전과 덕흥전
함녕전은 1897년 건립되어 왕의 침전 장소로 쓰였고,덕흥전은 명성왕후의 모태였던 경효전의 위치했던 곳으로
후에 접견실로 사용되었던 곳입니다.
덕수궁을 나오니 수문교대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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